1사 만루 절체절명의 위기, 관중석에 울려 퍼진 건 다음 타자의 '비명' 뿐이었다

얼리는 10일(한국시각) 열린 애슬레틱스와의 원정 경기에 선발 등판, 5이닝 동안 무려 11개의 탈삼진을 솎아내며 5피안타 1볼넷 무실점이라는 완벽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더스틴 메이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얻게 된 대체 선발의 기회. 하지만 그는 이 기회를 '대체'가 아닌 '주인'의 자리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 그의 등판에 대한 기대치는 그리 높지 않았다. 2023년 신인 드래프트 5라운드라는 비교적 낮은 순번, 마이너리그를 빠르게 통과했지만 빅리그의 타자들을 상대로도 그의 공이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마운드에 선 얼리는 완전히 다른 투수였다. 1회를 가볍게 삼자범퇴로 처리한 그는, 2회에는 아웃카운트 3개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자신의 'K쇼' 서막을 알렸다.
진정한 백미는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났다. 3회, 2사 후 연속 안타를 맞으며 첫 실점 위기에 몰렸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스스로 이닝을 마무리지었다. 압권은 4회였다. 안타와 연속 안타가 터져 나오며 맞이한 1사 만루의 절체절명의 위기. 모든 관중이 숨을 죽인 순간, 얼리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는 데럴 허네이스와 로렌스 버틀러를 연속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포효했다. 스스로 만든 위기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워버리는, 신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강심장과 압도적인 구위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구속이 결코 특출나지 않다는 점이다. 이날 그의 평균 구속은 약 151.6km/h. 현대 야구의 광속구 투수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는 이 '평범한' 직구로 무려 6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 이는 그의 제구력, 무브먼트, 그리고 타자를 압도하는 배짱이 단순한 구속 수치를 뛰어넘는 강력한 무기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결국 얼리는 5이닝 11탈삼진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기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 11탈삼진은 보스턴 구단 역사상 데뷔전 최다 탈삼진 타이기록으로, 무려 48년 전인 1977년 돈 아시가 세운 전설적인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업이다.
경기 후 알렉스 코라 감독은 "주자가 나갔을 때도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충분한 투구였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팀 동료인 롭 레프스나이더 역시 "이보다 더 좋은 커리어 출발은 상상하기 어렵다"며 혀를 내둘렀다.
정작 역사의 주인공이 된 얼리는 담담했다. "아직 실감 나진 않지만, 우리가 이겼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 팀 승리를 자신의 기록보다 우선시하는 그의 모습에서, 팬들은 실력뿐만 아니라 인성까지 갖춘 진정한 스타의 탄생을 예감했다. 48년 만에 깨어난 전설, 보스턴의 심장을 뛰게 할 새로운 왼손 에이스의 시대가 마침내 시작되었다.